응시의 지연: 화면의 물질성과 지각적 틈(Ma)에 관하여
나의 작업은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미지가 데이터로 치환되어 광속으로 소비되는 동시대의 시각 문화 안에서, 회화는 역설적으로 자신의 물리적 몸을 드러냄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붙드는 ‘감속기’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사람들이 화면 앞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만드는 조건, 즉 ‘지연된 응시’를 위한 회화적 장치들을 연구하고 있다.
회화는 나에게 단순한 장식이 아닌, 관객의 신체적 감각을 깨우는 매개체이다. 나는 관객이 대상을 멀리서 관찰하며 형상을 파악하려는 ‘광학적 시각’을 넘어, 표면의 질감에 밀착하여 시각과 촉각이 교차하는 ‘촉각적 가시성(Haptic Visuality)’을 경험하길 원한다. 최근의 연작(도판 1, 5)에서 보이는 미세한 털과 같은 필치나 융기된 물감의 층은 이러한 의도의 결과물이다. 붓질의 궤적과 물성적 질감은 관객의 체성감각 피질을 자극하며, 실제 만지지 않더라도 뇌가 그 촉감을 시뮬레이션하도록 유도한다 .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행적 상상력’—화면의 흔적을 통해 작가의 신체적 행위를 역으로 추적하는 과정—은 관객과 작품 사이의 정서적 밀도를 높이고 응시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연장시킨다.
나의 작업에서 ‘Ma’라는 개념은 물리적 여백을 넘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이자, 존재가 가려지면서 동시에 출몰하는 ‘틈’을 의미한다. 나는 화면을 덮거나 물감을 흘려 입자로 분산시키는 행위를 통해 형상을 의도적으로 불투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가려짐’은 시선의 권력을 무너뜨린다. 관객은 대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인지적 불확실성 앞에 놓이게 되며, 뇌는 이 불완전한 이미지를 해독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특히 연두색 표면에 두 개의 어두운 구멍을 배치한 작업(도판 3)은 인간의 본능적인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자극하여 관객이 화면의 ‘시선’과 마주치게 함으로써 강력한 인지적 고착을 유도한다.
회화는 나에게 단순한 장식이 아닌, 관객의 신체적 감각을 깨우는 매개체이다. 나는 관객이 대상을 멀리서 관찰하며 형상을 파악하려는 ‘광학적 시각’을 넘어, 표면의 질감에 밀착하여 시각과 촉각이 교차하는 ‘촉각적 가시성(Haptic Visuality)’을 경험하길 원한다. 최근의 연작(도판 1, 5)에서 보이는 미세한 털과 같은 필치나 융기된 물감의 층은 이러한 의도의 결과물이다. 붓질의 궤적과 물성적 질감은 관객의 체성감각 피질을 자극하며, 실제 만지지 않더라도 뇌가 그 촉감을 시뮬레이션하도록 유도한다 .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역행적 상상력’—화면의 흔적을 통해 작가의 신체적 행위를 역으로 추적하는 과정—은 관객과 작품 사이의 정서적 밀도를 높이고 응시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연장시킨다.
나의 작업에서 ‘Ma’라는 개념은 물리적 여백을 넘어 사물과 사물 사이의 연결이자, 존재가 가려지면서 동시에 출몰하는 ‘틈’을 의미한다. 나는 화면을 덮거나 물감을 흘려 입자로 분산시키는 행위를 통해 형상을 의도적으로 불투명하게 만든다. 이러한 ‘가려짐’은 시선의 권력을 무너뜨린다. 관객은 대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없는 인지적 불확실성 앞에 놓이게 되며, 뇌는 이 불완전한 이미지를 해독하기 위해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특히 연두색 표면에 두 개의 어두운 구멍을 배치한 작업(도판 3)은 인간의 본능적인 파레이돌리아(Pareidolia)를 자극하여 관객이 화면의 ‘시선’과 마주치게 함으로써 강력한 인지적 고착을 유도한다.
결국 나의 회화는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시선이 형성되는 조건’ 그 자체를 목격하게 하는 장치이다. 색채 대비와 질감의 불연속성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관객의 안구가 화면의 리듬을 따라 유기적으로 순환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경험은 현대인의 분절된 주의력을 회복시키고, 매끄러운 디지털 이미지 이면에 존재하는 물질의 경이로움과 접촉하게 한다. 나에게 회화는 정지된 평면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지각의 사건이며, 관객이 화면의 틈새에서 자신만의 기억과 감각을 발견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도판1
도판3